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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소나기

2023-06-14

문화 문화놀이터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소나기
'글. 유병숙'

    중학교 1학년 국어 시간에 〈나의 미래〉라는 제목의 글짓기 숙제가 있었다. 나의 발표 차례가 되었다. “나는 커서 무엇이 될까? 생각하면 해골이 복잡합니다.” 첫 문장을 읽자마자 선생님은 폭소를 터뜨리며 비속어는 가급적 쓰지 않는 게 좋다고 하셨다. 나는 당황하여 얼결에 읽어나갔다. 읽기를 마치자 선생님은 교탁에 두고 가라 하셨다. 돌아온 원고지 여백에는 빨간 글씨가 가득했다.
    선생님은 수업 틈틈이 칠판에 시를 쓰시고 읽어 주었다. 선생님의 비음 섞인 목소리가 노랫가락처럼 들렸다. 특별히 시간을 내어 교과서 밖 소설의 문장을 읽어주기도 했고, 독후감을 과제로 내주기도 하셨다. 선생님을 통해 차츰 글의 맛을 알아가게 되었다.  
    중간고사가 있던 무렵, 국어 선생님이 다리를 전다는 소문이 퍼졌다. 청소 시간에 유리창을 같이 닦던 친구의 말에 의하면 선생님은 한쪽 다리가 짧다고 했다. 또다른 친구는 굽의 높낮이를 맞춘 구두를 주문해 신는다고도 했다. 그때는 통굽 구두가 유행이었다. 설마? 하면서도  선생님의 구두 높이를 가늠해 보곤 했는데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나는 몸을 한쪽으로 기울이고 껑충거리며 걷는 모습이 오해를 불러온 것 같다며 선생님을 변호했다. 친구들은 어머, 너는 아직도 그 생각을 하고 있니? 그냥 소문이야! 하며 나를 놀려댔다. 졸지에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어느 날인가부터 국어 선생님과 국사 선생님이 사귄다는 말이 돌았다. 학교는 순식간에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훈남인 국사 선생님 덕분에 나는 국사를 좋아하게 되었고, 수업 시간이 항상 짧게 느껴졌다. 핸섬한 국사 선생님과 상대적으로 예쁘지도 않고, 키도 크지 않은, 더구나 다리를 절고 있다는 국어 선생님과의 연애 소문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친구들은 모이기만 하면 쑥덕쑥덕 질투의 화살을 날렸다. 국어 선생님의 어떤 모습이 연정을 일으켰을까? 나는 선생님의 일거수일투족에서 그 의미를 가늠해보았다. 소문을 아는지 모르는지 국어 선생님의 눈은 꿈을 꾸고 있는 듯 몽롱한 빛을 띠고 있었다.  
    국사 선생님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수업이 시작되면 아이들은 넥타이가 왜 핑크색이에요? 머리 스타일은 왜 바꾸셨어요? 등등 엉뚱한 질문을 해댔고, 수업이 끝나면 복도 끝까지 줄지어 따라가기도 했다. 한번은 두 분이 교무실을 향해 나란히 걷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아이들이 와! 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까닭 없이 내 가슴도 심하게 두방망이질해댔다. 
    2학년이 되자 나는 배구선수로 활동하게 되었다. 훈련을 마치면 어스름한 저녁이 되곤 했다. 하루는 늦게 퇴근하는 국어 선생님을 교문 앞에서 뵈었다. 어깨를 내려뜨리고 걸어오는 선생님의 표정이 어둡고 쓸쓸해 보였다. 다가가 인사를 하자 어? 여태 뭐해? 하며 억지로 웃는 모습이 괜스레 슬퍼 보였다.   
    소문과 달리 국사 선생님이 사모했던 분은 음악 선생님이었다. 몰래 연애를 이어가던 두 분은 마침내 결혼식을 올렸다. 목소리가 부드럽지만 다소 까칠한 성격의 음악 선생님은 집안이 좋다고 했다. 결혼식을 마치고 돌아온 음악 선생님의 얼굴에서 안경이 사라졌다. 우리가 물으니 콘택트렌즈를 했다며 수줍게 웃으셨다. 달걀형 얼굴에 환한 빛이 감돌았다. 참 어여쁘시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이상스레 가슴이 아파왔다. 내가 꿈꾸었던 드라마는 이런 게 아니었다. 어쩌면 연애 소문은 또, 우리가 지어낸 건 아니었을까? 의문이 들었다.
    체육 시간, 운동장에서 준비운동을 하고 있었다. 하얀 뭉게구름이 떠 있던 하늘에 검은 구름이 적군처럼 밀려왔다. 사방이 삽시간에 어두워지더니 느닷없이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소나기가 마치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당황한 아이들은 아우성치며 신발주머니로 머리를 가린 채 교사 처마 밑으로 뛰어들었다. 숨을 고르고 있는데 교실의 창문이 활짝 열리더니 국어 선생님이 불쑥 나타나셨다. 선생님은 쏟아지는 비를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순간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비는 바람을 타고 사선으로 나부꼈다. 선생님을 따라하듯 아이들도 창문을 열어젖혔다. 교실로 들어가려던 우리 반 아이들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약속이나 한 듯 운동장으로 뛰쳐나갔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의식을 치르듯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맴을 돌았다. 우리들 가슴에 살고 있던 환호성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마음도, 몸도 모두 흠뻑 젖어 들었다. 묵은 슬픔이 서서히 씻겨나갔다. 교장 선생님은 교내 방송 마이크를 잡고 운동장의 학생들은 다 들어가라고, 교실 창문은 모두 닫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셨다. 쏴아아! 줄기차게 퍼붓던 소나기는 삽시에 사라졌고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 하늘에는 다시 태양이 눈부시게 빛났다.
    국어 선생님은 그해 다른 학교로 전근 가셨다. 소나기에 마음을 내어준 그날, 그 황홀경을 떠올리면 지금도 내 가슴은 까닭 모르게, 이유도 없이 환희로 차오르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