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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리터의 피

2021-08-05

문화


피에 얽힌 의학, 신화, 역사 그리고 돈
5리터의 피
'인류의 운명을 결정해온 붉은 액체의 진실'


인체에서 가장 귀중하고 신비롭고 위험한 물질
    책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작가는 자궁내막증을 앓고 있어 생리 때마다 다달이 몸과 마음이 뒤틀리는 고통을 겪는다. 이런 자신의 경험에서 출발해 생리를 주제로 한 집필을 시작하다, 피의 모든 면을 다루는 쪽으로 범위를 넓힌 것이다. 결국 자연스레 피에 얽힌 의학, 과학, 역사, 문화, 종교, 경제 등 모든 이야기가 담긴 이 책 《5리터의 피》가 완성되었다.
    우선 피의 역사부터 살펴보자. 고대에는 사혈을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여겼다. 기원전 5세기 히포크라테스 시대부터 인류는 몇천 년 동안 두통부터 질식까지 다양한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피를 뽑았다. 심지어 산업혁명 이후의 19세기까지도. 오늘날에는 생명을 위해 수혈을 하지만, 인류의 대부분 역사에서 우리는 건강을 위해 몸에 피를 넣기보다 빼내는 쪽을 선호한 것이다. 작가는 바로 이 사혈의 역사와, 오늘날까지 여전히 의학적으로 쓰이고 있는 거머리 사혈을 조명한다. 그 과정에서 취재한 웨일스 서남부에 위치한 의료용 거머리 공급업체 이야기는 거머리가 얼마나 인류에게 가치 있는 악마(?)인지를 알게 해준다. 
    이외에도 아리아인의 순수 혈통에 사로잡혀 수많은 부상병을 사망에 이르게 한 나치 독일의 착오, 혈액형에 따라 인간의 성격을 구분한 일본의 관습 등 피의 그릇된 역사부터 피가 신체 어디에서 생성되는지, 우리가 헌혈한 피가 어떻게 보관, 처리, 유통되는지에 대한 상식에 이르기까지 작가 특유의 흡입력 넘치는 문체로 술술 풀어낸다. 그 덕분에 피가 인류의 역사에서 얼마나 위험하고도 신비로운 물질인지를 제대로 엿볼 수 있다.


생명과 죽음을 결정짓는 구원자이자 파괴자
    세계 어딘가에서 3초마다 누군가는 낯선 사람의 피를 받는다. 176개국의 헌혈 센터 1만 3,282곳에서 해마다 1억 1,000만 명이 헌혈한다. 이 모든 피는 외상 환자와 암 환자, 만성 질환자, 그리고 아이를 낳는 산모에게 수혈된다. 오늘날 우리는 헌혈과 수혈을 매우 흔하게 생각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 몸속의 물질이 다른 사람에게 이동해 그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히 경이로운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당연하게 여기는 현대의 헌혈-수혈 체계는 누가 만들었을까? 작가는 우리에게는 다소 알려지지 않은 두 명의 선구자를 소개한다. 한 사람은 20세기 초 여성이라는 장벽을 뚫고 대규모 헌혈, 혈액 저장 및 운송, 수혈 시스템을 마련한 여성 의학자 재닛 마리아 본이며, 다른 한 사람은 오늘날과 같은 자발적 혈액 기증 체계를 만든 영국 중간급 공무원 퍼시 레인 올리버다. 이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함께, 2차 세계대전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피를 기증했는지, 또 그 피를 병사들에게 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위험을 무릅썼는지에 대한 에피소드는 진지하면서도 자못 재미있기까지 하다.
    피는 이처럼 인간의 생명을 살리기도 하지만, 반대로 전염병과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같은 피의 양면성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를 남아공 케이프타운의 흑인 거주구역으로 안내한다. 이제는 HIV가 통제 가능한 바이러스라고 하나, 세계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작가는 이곳 케이프타운 흑인 거주지의 실태를 통해 밝힌다. 그리고 힘주어 말한다. HIV는 여전히 들끓고 있다고.
인권을 유린하고 자본을 유혹하는 자원
    인간과 동물의 피가 전 세계 상품 중 교역량이 13번째로 많다는 사실을 아는가? 혈액제제는 대부분 혈장에서 추출한 것인데, 원산지는 세계 최대의 혈장 수출국, 바로 미국이다. 미국이 이런 혈액 수출로 벌어들인 수익은 연간 약 200억 달러에 이른다. 한마디로 미국은 혈액의 OPEC인 셈이다. 문제는 미국이 지금껏 혈액을 상업적 거래물로 취급하면서 전 세계에 HIV나 C형 간염 바이러스가 섞인 ‘더러운 피’가 유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캐나나 중남부 초원지대에 위치한 어느 혈장 기업을 취재해 혈액 거래의 어두운 이면을 고발하고, 오염된 혈장을 수혈해 이중으로 고통받는 혈우병 환자들의 사연을 들려준다.
    피를 둘러싼 어두운 현실은 산업에만 머물지 않는다. ‘차우파디’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차우파디는 네팔 지역에서 행해지는 악습으로, 생리하는 여성과 소녀를 외딴 헛간에서 지내게 하는 제도다. 작가는 직접 네팔 서부의 시골 마을을 찾아가 우리에게 심각한 성차별이자 인권 유린의 현장을 낱낱이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가난한 여성들에게는 생리대 한 장도 사치품이다. 이 슬픈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멀리 갈 필요도 없다. 2016년 우리에게 안타까움과 충격을 안겨준 ‘깔창 생리대’ 사건이 있지 않은가. 작가는 케냐의 빈민가 소녀들 중 절반이 생리대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매춘을 한다고 보고한다. ‘생리대를 위한 섹스’인 것이다. 빌 게이츠가 그랬듯 누구나 이 대목에서 피가 끓고 말 것이다. 
인류의 운명을 결정해온 붉은 액체의 진실
    이제는 고대처럼 인간이나 짐승의 피를 제물로 바치지 않지만, 피의 힘은 지금까지 언어에 그대로 남아 있다. 혈연, 혈맹, 혈통 같은 단어를 생각해보라. 또 피가 끓는다, 피가 마른다, 피가 거꾸로 솟는다 같은 표현에서는 격정적인 감정이 자리한다. 실제로 피는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는 힘이 있고, 그렇기에 인류는 예나 지금이나 피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피의 실체는 지금까지 대부분 신비에 싸여 있다. 이 책은 바로 그 신비의 베일을 하나하나 벗겨 우리가 피의 진실에 조금 더 가까이 가도록 인도한다. 
저자. 로즈 조지
    영국 저널리스트이자 저명한 논픽션 작가. 세계적인 컬처 매거진 〈컬러스(COLORS)〉의 수석 편집자를 지냈으며, 〈뉴욕 타임스〉 〈파이낸셜 타임스〉 〈가디언〉 〈인디펜던트〉 〈데일리 텔레그래프〉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등 유수의 매체에 기고해왔다. 코소보 내전 당시 전쟁 특파원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사담 후세인을 여러 차례 인터뷰했고 그의 생일 파티에 초대되기도 했다. 《5리터의 피》는 빌 게이츠로부터 “혈액에 대해 알고 싶었던 모든 것이 담겨 있다”며 극찬을 받았고,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올해의 도서상 최종 후보작에 오른 바 있다. 그 밖의 저서로는, 라이베리아 난민 문제를 파헤친 《제거된 삶(A Life Removed)》, 화장실과 위생의 문화사를 다룬 《똥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진지하게(The Big Necessity)》, 국제 해운 세계를 탐사한 《모든 것의 90퍼센트(Ninety Percent of Everything)》 등이 있다. 옥스퍼드대학에서 현대언어학 학사 학위를,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국제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영국 요크셔에 거주하고 있다. 
역자. 김정아
    사람과 세상이 궁금한 번역 노동자. 글밥 아카데미 수료 뒤 바른번역 소속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누구 먼저 살려야 할까?》 《살인 미생물과의 전쟁》 《로르샤흐》 《노동의 시대는 끝났다》 《휴머놀로지》 《안녕, 인간》 《초연결》 《부자 교육》 《왓츠 더 퓨처》 《차이나 유스 컬처》 《당신의 잠든 부를 깨워라》 《통계학을 떠받치는 일곱 기둥 이야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