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수필] 이음매에 꽃잔디

2023-06-14

문화 문화놀이터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이음매에 꽃잔디
'글. 최명임'

    바위 옹두라지가 걸리적거린다. 오래전부터 거기 있었을 텐데 야산을 개간하며 불편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란성 쌍둥이인지 머리가 둘이다. 얼굴을 내밀고 있지만,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처지가 갑갑해 보인다. 캐내어 반송 무리에 두고 싶었다. 
    바위는 처음부터 둘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환경이 갈라놓았다. 습한 땅속에 얼마나 갇혀 있었는지 몸뚱이도 갈라지고 살점이 조각조각 부서져 내렸다. 바위도 환경의 지배를 받으면 견딜 수가 없나 보다. 하나로 봉합하려면 바늘과 실이 될 무엇이 단단히 필요하겠다. 이음매에 흔적이 남겠지만, 그조차 아름다울 때가 있다. 둘로 갈라진 아픔이 만만치 않았을 거다.
    젊은 엄마들이 코로나19로 공황장애니, 우울증이니 맘카페에 넋두리가 분분하다. 아이들은 집에 갇혀서 어미들 속을 발칵 뒤집는다. 어미들이 애물단지라고 비명을 지르는데 저들의 과거사는 깡그리 잊었나 보다. 
    둘째가 부쩍 우울해한다. 독박육아와 답답한 일상에 지쳐 번아웃 증후군을 앓는 눈치다. 몇 년째 주말 부부로 산 탓도 있겠다. 딸애는 사위도 없이 감당하는 일상과 두 아이에게 얽매여 늘 허우적거린다. 네 활개를 펴고 숙면에 취해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다. 



    발목골절을 시작으로 수술을 네 차례나 받았다. 그 탓인지 유하가 이른둥이로 태어났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아기가 숨을 쉬는지 확인했다. 남은 진까지 다 빼 버렸는데 동생에게 뺏긴 사랑이 그리워 큰 녀석이 전에 없는 생떼를 쓴다. 사위는 한 달째 출장 중이다. 제 남편이 코로나가 발발하는 타국에서 숨이나 제대로 쉬는지 노심초사한다. 언제부턴가 심장이 벌렁거리고 숨을 쉴 수가 없다고 가슴을 툭툭 친다. 한의사는 산후 우울증이라 하고 집 앞 병원에서는 공황장애라고 처방을 내렸다. 
    딸애 마음을 단단히 붙들고 있던 매듭 하나가 툭 끊어져 버렸다. 안타까워 누여놓고 막힌 가슴을 툭툭 치며 화기를 뱉어보라고 했다. 어설픈 재주로 혈 자리를 누르고 온몸을 쓸어내렸다. 비손하는 마음이 통했는지 잠이 들었다. 내가 없는 사이 여섯 살 어린것이 어미를 누이고 가슴을 톡톡 치며 ‘아~’해 보라고, 두 살 유하가 어미 가슴을 토닥토닥하더니 제가 ‘아~’ 하더라고 감동한 눈치다. “자식이란 그런 것이여!” 애물愛物이고 애물단지라고 한마디 했다.  
    딸애 나이 무렵 나도 무척 힘이 들었다. 세 아이 키우느라 몸도 마음도 과부하가 걸려 자주 몸살을 앓았다. 우리 어매는 조카자식까지 일곱을 키웠다고, 장모님도 여덟 명을 키우지 않았느냐며 남편은 내 모습에 낯설어했다. 더 보태 울 어매 깨밭 매는데 가서 한 달만 있다가 오겠느냐고 타박을 했다. 사느라 아플 새도 없이 급급했던 어머니에 비하면 호강이지만, 그에게 바란 것은 위로 한마디였다.
    어머니는 참깨 씨를 뿌려놓고 잎이 나오면 깨솎기를 하셨는데 쓸 만한 것은 두고 가차 없이 뽑아버리셨다. 어머니 옆에서 무자비하게 올라오는 잡초까지 호미로 북북 매고 있으면 우울감 따위는 사라졌을 거다. 깨닫는 것이 있을 테니 가보라는 언질은 아니었다.
    내 편 하나만 있으면 견딜만하다. 멀어서 일 년에 한 번 오시는 친정어머니는 한 달을 계셨다. 어머니 살 냄새만 맡아도 다 나은 것 같았다. 속내를 털어놓으면 뜨거운 것이 쑥 빠져나갔다. 평생 자식들의 아픈 곳을 꿰매느라 바늘 끝이 닳아 버린 어머니는 정작 어찌 감당하셨을까. 
    새벽마다 도시락을 쌌다. 두 집 손자 손녀 넷을 데리고 딸애와 함께 집을 나섰다. 물소리 들리고 초록 바람 부는 어디라도 가보자고 나서는데 안 계신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딸아이가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활짝 웃었다. 쌍둥이 두 손녀와 손자 녀석이 유하를 데리고 천방지축 솔숲을 내달렸다. 저들이 나에게 꽃잔디임에 바라만 보아도 행복했다.
    갈라진 바위를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 틈새만 메꾸면 하나가 될 텐데…. 바위 본질은 흙이 아닌가, 서너 줌 흙이면 하나가 되려나. 비바람이 덧없이 날려버릴 거다. 틈은 내려갈수록 좁아지더니 심장을 뚫어내지 못했다. 
    틈새에 꽃잔디를 심었다. 이음매에 꽃이 피면 곱기도 하겠다. 그 근성이면 무리는 없겠으나 걱정이다. 삼복염천에 바위도 불덩이가 될 텐데 타죽거나, 얼어 죽거나, 오가는 비에 명맥을 유지한다 해도 얼마나 버티려나. 
    바위틈에 봄이 왔다. 분홍색 꽃잔디로 와 주었다. 희생과 온화가 꽃말이라더니 필경 뿌리가 심장에 박여버린 것이다. ‘얼마나 애를 썼을까!’ 수 가닥 초록 색실로 꿰매 놓고 누가 알까, 분홍 꽃잎으로 살포시 덮어놓았다. 왈칵 감동이 밀려왔다. 상충인 줄 알았는데 상합이다. 바위는 당당히 자릴 잡고 앉아 나에게 묻는다. 
    갈라진 채로 존재하는 것이 한 둘이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까지 시시때때로 반목을 일삼는다. 해서 세상은 이리 시끄럽고 누군가는 꿰매느라 숨찬 몸짓이다.
어떤 틈새에도 허세로 뭉친 장미는 위선이다. 꽃잔디의 근성이라면 무리는 없겠다. 분합分合을 반복하는 두 마음이 하나가 되겠지. 나는 바위와 달라서 삿된 것일랑 버리고 진짜만 오롯했으면 좋겠다. 상합이 변덕을 부리면 또 분열을 조장할 테니.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데 코로나는 여전히 극성이다. 찬기가 싫어 그만하고 싶은데 맛을 들인 녀석들이 소풍 가자고 조른다. 한결 편해진 딸애 숨소리를 들으며 집을 나선다. 남은 틈마저 꿰매 놓고 나면 딸애 곁에서 한 걸음 물러나야겠다.
    조만간 딸의 내일이 명개같이 정리될 터이다. 저도 어미이매 자식과 어미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에게 꽃잔디 임을 알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