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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아름다운 결미

2023-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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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아름다운 결미
'글. 최명임'

    한해 가을 천태산 산행을 갔을 때 영국사 문전에 은행나무가 환상적이었다. 헤아릴 수 없는 이파리들이 완벽한 황금색으로 물들어있었다. 천년을 묵는 동안 고승의 독경 소리를 문전걸식하였으니, 드디어 해탈한 듯 황금 불상처럼 좌정하고 있었다. 오가는 중생들이 우르르 몰려와 경이의 눈으로 올려다보며 마음이 부신 듯했다. 나는 합장하고 고개를 숙여야 할 것 같은 경건지심이 들었는데 일부 사람은 정말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찾았더니 노목은 텅 빈 가슴에 수백 개의 사리를 품고 맹풍을 맞고 있었다. 노구를 지탱하기 힘들어서 지주에 몸을 의지하고 장구한 세월에 얻은 상처는 시멘트로 싸매놓았다. 그 연륜이면 바람이 흔들어도 끄떡없을 터이지만, 혹 명줄이라도 놓을까 안타까웠다. 천년고찰 앞에서 고승을 닮아버린 노거수,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돌아오는 길 속세의 한길에 은행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미처 나이테도 형성되지 않은 천방지축이라 자주 바람에 휘둘린다. 태풍이 흔들어 가지가 꺾이고 이파리가  우수수 떨어져도 뿌리는 깊이 내려야 하니 그 처지가 안쓰럽다. 행여 방랑자의 삶처럼 자유만 고집해서는 낙오자로 남으리라. 





    산사에 다녀온 뒤 저 어린 나무의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자주 올려다본다. 영국사 비목처럼 해탈의 경지에 이르려면 어림잡아 천년하고도 두 천년은 더 살아야겠거니. 그때까지 저 버거운 나이테를 어찌 만들어가려나.
    가을이 깊었다. 어린 은행나무들은 이파리가 원숙한 색채와 미완의 색으로 나누어졌다. 기상이변으로 두서없이 잎을 피운다지만 그래도 때맞춰 결실은 보아야 하거늘 뒤늦게 퍼런 은행잎이 햇살을 붙들고 바쁘다. 계절은 사사로이 기다려줄 여유도 없는데 나무는 무슨 일로 미적대다 채색도 못 했는지…. 변명의 여지를 주면 줄줄이 물고 늘어지겠지만 저의 무능함을 확인하는 꼴이 될 게다. 
    서리가 내리더니 그예 아름다운 결미를 놓쳐버렸다. 채색도 못한 이파리가 땅에 주저앉아 황망한 표정이다. 어쩌자고 은혜로운 시간을 다 허비하고 후회로 참담해 하는지. 저 안타까운 군상들은 자연의 질서에 따라 내몰린 의미 없는 떨거지가 되었다. 청소부가 힘겹게 쓸어 모아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 떠났다. 창백한 얼굴이 눈에 밟힌다. 그래도 은행나무는 계절이 바뀌면 다시 잎을 피우고 열매도 맺을 기회가 있으니 사람만 하랴. 
    그도 저도 모두 떨어진 날, 인생도 저와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쓸쓸했다. 나의 계절은 어디쯤 왔으며 어떤 색깔로 어디로 흘러가고 있을까.  
    일찍 영글어 땅에 떨어진 봉선화 씨앗이 그 가을에 싹을 틔워 한 뼘을 넘어섰다. 한 녀석의 어이없는 도발이 아닌 열댓 포기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곧 꽃을 피울 기세로 보아 아름다운 결미를 장담하고 있다. 내심 어리석은 것들의 앞날이 보여서 나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한 치 앞을 모르고 사는 것이 인간의 몫인 줄 알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얼마가지 못해 안일함에 젖은 오만 위로 된서리가 내렸다.  
    저 미완의 은행나무가 버린 이파리와, 어리석은 봉선화는 회한에 젖은 절망이다. 목표를 잃어버린 사람과, 목적도 없이 달려와 거울 앞에 선 사람처럼 허무한 눈빛이다. 쉽게 얻고자 하였으니 실패하였고 쉽게 얻었어도 종당에는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영국사 은행나무의 비색은 아름다운 결미이다. 긴 시간 갈고 닦아 빛을 발하는 대기만성한 사람이다. 완성을 이룬 수행자의 상단전에 머무는 황금 색채이다. 깊은 사색과 밤을 지새운 고뇌로 채찍질하였으니 능히 저를 증언하고도 남았다. 그 오랜 시간 한결같이 부처님 문전에 살다 뼛속까지 불심으로 완성을 이루었다. 세상영욕 다 버리고 부처님 문전에서도 천년에 얻은 경지라면 저 어린 은행나무의 지금을 탓하는 내 근시안적 망발은 도로 주워 담아야 옳겠다. 천태산도 독경 소리도 없는 아수라장에 살지만, 천 년하고도 두 천 년쯤 더 미완의 계절을 나면 분명 해탈의 경지에 이를 테니 말이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은 더더욱 그러하겠거니, 몇 겁을 건너와야 해탈에 이를까. 우리는 저마다 어떤 색깔로 지금을 지나가고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