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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솜리 근대역사문화공간

2023-03-24

문화 문화놀이터


익산의 근현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현장
익산 솜리 근대역사문화공간
'근대역사기행'

   익산시는 계획도시이다. 일제가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의 미곡을 수탈할 목적으로 조성했다. 허허벌판에 철도가 놓이고 역이 세워지자 사람들이 몰려들고 상권이 형성됐다. 작은 시골마을인 '솜리'는 순식간에 호남 최대의 교통 요충지로 성장했다. 오늘날 익산시에는 일제강점기 당시의 건물과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건물과 상점들이 공존하는 익산 솜리 근대역사문화공간 전경. 맨 아래 오른쪽의 하얀 건물이 남부시장(옛 솜리시장)이다. 


작은 솜리마을이 호남 최대 교통요충지가 되다
   지금의 익산시는 1995년에 이리시와 익산군의 도농통합으로 탄생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익산의 중심지는 금마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미륵사지가 자리한 금마는 옛 마한의 도읍지이자 한때 백제의 왕도였다는 설이 전해 오는 곳이다. 1899년의 군산항 개항과 1908년의 전군가도(지금의 번영로) 개통 전까지 금마는 전주와 강경 사이에서 가장 크고 번성한 도시였다. 금마를 중심으로 한 ‘구 익산’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급격히 쇠퇴했다. 반면에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신 이리’는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속 리(裡)’에 ‘마을 리(里)’를 쓰는 ‘이리’는 ‘솜리’라는 우리말 지명을 일제가 한자로 표기한 지명이다. 드넓은 평야의 갈대밭 속에 들어선 솜리마을에는 10여 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그런 시골마을에 이리역(지금의 익산역)이 들어선 뒤로 상전벽해나 다름없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1912년 3월 호남선 철도의 강경~이리 구간과 이리~군산 간의 군산선 철도 전 구간이 동시에 개통됐다. 그보다 4년 전에는 전주에서 익산 목천포를 거쳐 군산까지 이어지는 신작로인 전군가도가 완공됐다. ‘솜리’에 조성된 신도시 ‘이리’에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리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시가지가 생겨나고, 솜리시장(지금의 남부시장)과 우시장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됐다. 그 당시 두드러진 변화 중 하나는 일본인들의 급격한 유입이었다. 1915년 이리에 거주하는 조선인 수는 1,367명에 불과한 반면, 일본인은 무려 2,053명이나 되었다.
   현재 익산시에는 총 21점의 국가등록문화재가 분포한다. 그 가운데 절반이 넘는 12점이 면적 19,963㎡(6,038평)의 솜리 근대역사문화공간에 위치한다. 이 일대에는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크고 작은 공장과 상점들이 꾸준히 들어섰고, 해방된 뒤로는 주단거리와 양키골목이 형성되면서 수많은 인파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1977년 11월에 발생한 이리역 폭발사고의 피해 복구를 위한 ‘새이리 건설계획’으로 인해 이리시가 확장되고 상권이 다른 곳으로 분산 되면서 솜리시장 주변의 상권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현재 익산시에는 총 21점의 국가등록문화재가 분포한다. 

 
左) 일제강점기에 양은공장 건물로 세워진 평동로 근대상가주택1의 높은 굴뚝
右) 평동로 근대상가주택1의 2층 방안에 설치된 벽장. 특이하게도 비밀수납장과 새장이 있다.


작은 골목길에서 만난 익산의 근현대 역사
   익산 솜리 근대역사문화공간은 익산역에서 1km쯤 떨어져 있다. 느긋하게 걸어도 20분 안팎이면 도착한다. 가는 길에서는 익산문화예술의거리에 있는 익산근대역사관도 꼭 한번 들러볼 만하다. 1922년에 처음 세워진 익산 중앙동 구 삼산의원(국가등록문화재)건물을 리모델링해서 2019년에 익산근대역사관으로 개관했다. 벽돌을 쌓은 조적 건물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절단해체되어 원래 자리에서 150m쯤 떨어진 현 위치로 이전됐다. 이곳에는 익산의 근현대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생생한 사진과 다양한 자료가 전시돼 있다. 

 
1960년대 지어졌다는 구 신신백화점 건물. 지금도 1층은 주단 가게, 2층은 다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익산근대역사관에서 도보로 약 15분 거리의 솜리 근대역사문화공간에서 맨 먼저 만나는 국가등록문화재 건물은 인북로 근대상가주택이다. 1960년대에 지어진 2층 상가주택인데 지금은 함석으로 덕트(duct, 배관)를 만드는 작업장이 들어서 있다. 1925년에 건립된 구 이리금융조합 건물도 가까이에 있지만, 지금은 방문자 센터 공사 중이어서 가림막이 둘러쳐져 있다. 
   구 이리금융조합 건물 앞에서 30~40m를 더 걸어가면 평동로11길과 교차되는 사거리를 만난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보화당한의원 구 건조창고, 평동로 근대상가주택1~5, 구 신신백화점등의 국가등록문화재 건물들이 잇달아 나타난다. 30~40년 전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골목길 풍경이 조금은 낯설면서도 마음이 편하게 느껴진다.

 
01. 처음부터 한약재 건조창고로 지어진 보화당한의원 구 건조창고 
02. 주현동 4.4만세기념공원 내의 순국열사 문용기 선생상. 맨 왼쪽에 1912년 완공된 오하시농장 석축 중 일부가 보인다. 
03. 익산 주현동 구 일본인 농장 사무실. 일본인이 운영한 대교농장의 부속 건물로 지어졌다.


   얼마 전만 해도 주단 가게(한복집)였다가 폐업한 평동로 근대상가주택2를 제외한 건물들은 여전히 상점으로 쓰이고 있다. 그중 ‘금풍상회’라는 간판이 내걸린 평동로 근대상가주택1의 구조가 흥미롭다. 처음에 양은공장으로 지어졌다는 이 건물의 2층은 일본 전통 방식의 다다미방이었다가 오래전에 나무 바닥으로 바뀌었지만 방안 내부의 붙박이장, 일본식 비밀벽장, 새장과 건물 뒤편의 공장 굴뚝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평동로11길과 인북로10길의 교차로에 자리 잡은 구 신신백화점 건물은 1960년에 건립된 3층 건물이다. 외관은 낡고 허름한데도 상가건물로서의 역할은 여전히 충실하다. 지금도 1층에는 주단 가게, 2층에는 다방이 영업 중이다.
   구 신신백화점에서 동쪽으로 약 90m 거리에는 일본인 오하시 요이치의 구 대교농장 사택이 자리 잡았다. 근처에는 이 농장의 사무실로 쓰였던 ‘익산 주현동 구 일본인 농장 사무실’ 건물과 1912년에 준공된 석축도 남아 있다. 모두 조선인을 수탈했던 일본인들이 남긴 자취들이다. 구 대교농장 사택 앞에는 1919년 4월 4일 솜리장터에서 있었던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는 공원이 조성돼 있다. 한복판에 우뚝한 순국열사 문용기 선생상은 여전히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질 듯이 외친다. 익산 사람들이 겪어 온 자랑스러운 역사와 어두운 역사의 흔적이 하나의 공간 안에 공존하는 셈이다. 왠지 모르게 숙연해진 마음속에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