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부메랑
'글. 최명임'

고라니나 노루, 산토끼의 피해는 농부들이 흔히 겪던 일이다. 고 작은 입으로 오물오물 새순만 똑 따먹고 가는 녀석들이나 해바라기 여문 씨알을 반타작해 가는 까치도 그러려니 한다. 개체 수가 늘다 보니 울타리를 치고 신경전을 벌이기는 해도 얄미운 이웃 정도이다.
가덕도의 멧돼지 열한 마리가 제 영역을 이탈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바다를 헤엄쳐 뭍에 도착한 산적들의 소동으로 난데없는 전쟁을 치렀다. 멧돼지의 횡포는 공포를 자아낸다. 한 떼기 고구마 밭을 밤사이 해치우는 일은 예사이고 시골 민가는 물론 벌건 대낮에 도심에 출몰하여 사람을 혼비백산하게 한다. 총알이 심장을 뚫고 치도곤을 당할지라도 무릅쓰고 나선 절박함이 있었으리라. 열한 마리 중 네 마리는 어미였는데 부르기만 해도 가슴 에이는 어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다섯 시간에 걸친 멧돼지의 사투는 패배로 끝나고 모두 사살되었다. 인간의 승전보와 함께 나란히 누운 그들은 장렬하게 전사했지만, SF 영화를 보는 듯 겁났다.





위험한 약탈자의 누명을 쓰고 주검이 되어 누운 그들을 보며 일말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제 영역에서 내몰린 멧돼지의 횡포는 궁여지책이라. 울분을 참지 못한 동학군처럼 떼 지어 들이닥치면 도시 전체가 공포의 도가니가 될지 모른다.
산중 짐승들이 인간의 영역에 자주 출몰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고속도로에서도 처참하게 깔려 죽은 고라니를 자주 본다. 형체를 알기 어려워서 그렇지 청솔모의 희생도 부지기수이다. 어처구니없이 도로에서 횡액을 당하는 그 사실보다 좀 더 근본적인 문제로 들어가면 이미 생태계의 파괴로 지구가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는 점이다.





그 후유증으로 우리의 삶이 흔들린다. 햇살이 아무리 좋아도 오염된 공기로 숨쉬기가 곤란하고 허연 마스크가 거리를 배회하는 신종 풍경이 생겨났다. 조만간 집 앞 마트에 산소를 담은 병이 즐비하게 진열될지도 모른다. 사막화가 된 호수와 숲에 동물들의 사체가 널리고 신발이 없는 아이들이 물동이를 이고 물을 찾아 몇 십리를 나서는 일은 오래 되었다. 물길은 순환의 법칙을 잃어버리고 엉뚱한 곳에서 사납게 휘몰아친다. 그 여파가 지구 곳곳으로 쓰나미 처럼 몰려온다. 아비규환 속에서 방주를 띄우고 우주의 미아로 떠돌지 모른다는 상상을 해 본다. 아주 먼 미래 어느 즈음일 거라는 안일함으로 말이다.
아이들이 신나게 부메랑을 날리고 있다. 발도 날개도 없는 것이 어찌 되돌아올까 생각하다 우리 삶에 복선을 깔고 있는 물건 같아 묘하게 마음이 끌렸다. 돌아온 부메랑을 붙들고 아이들이 해맑게 웃었지만, 미래에도 웃을 수 있을까.
아득히 먼 원시의 숲에 한 전사가 살았다. 부족을 이끄는 추장이거나 주술사였을 법하다. 그들에게 신성한 숲은 신앙이었고 무릉도원이었다. 숲 밖의 사람들은 부패한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 예수와 부처를 찾지만,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와 부처의 삶을 살았다니 천혜의 터전에서 오염이라는 억지스러운 단어조차 몰랐을 거다. 어느 날 불같이 일어나는 이기적 문명을 보았다. 그 숲이 영원하길 소망하며 아이들에게 청빈의 사냥 법은 물론 그들이 기대어 살아온 숲의 내력을 누누이 들려주었다. 그럼에도 안타까워 매 순간 자각하며 살기를 바람으로 만든 것이 부메랑이 아니었을까. 사냥감을 향해 날렸지만, 분명 그 염원에서 비롯된 소산물이었을 거다.





내게서 나간 것은 내게로 돌아온다는 삶의 이치를 반원에 새겨 넣고 나머지 반원은 후손들이 채워 완성을 이루면 좋겠다는 염원의 도구였을 거다. 그의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고 부메랑은 시공을 넘어와 21세기를 날고 있다.
말로 모건의 책 ‘무탄트 메시지’에 나오는 참사람 부족은 호주 대륙에서 5만 년 이상을 살아왔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어떤 숲도 파괴 하지 않고, 어떤 강물도 더럽히지 않고, 어떤 동물도 멸종 위기에 빠뜨리지 않고, 어떤 오염 물질도 자연 속에 내놓지 않았다고 했다. 그럼에도 풍부한 식량과 안식처를 얻을 수 있었고 그들은 창조적이고 건강한 삶을 오래도록 산 뒤에 영적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내용을 보았다. 우리가 꿈꾸는 무릉도원이, 아니 잃어버린 우리의 낙원이 그런 곳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오염된 지구에 더는 존재하기를 거부한 그 부족이 종족 번식을 멈추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태어난 아이가 죽으면 도태되어버린 여느 동물들처럼 그들은 지구상에서 사라진 종족의 하나로 남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무탄트라 부른다. 어떤 변화로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 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우리도 그들처럼 순수한 정신과 물질로만 구성된 자연이었을 거다. 돌연 변이가 되어버린 우리의 슬픈 역사가 그들에겐 진정 안타까운 일이고 그들의 역사가 비극으로 끝난다는 사실 또한 우리에겐 슬픈 일이다. 그들의 낙원이 마지막 한사람을 기억하며 사라지고 우리의 기억에서도 사라질 거다.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뒤에야, 마지막 강물이 더럽혀진 뒤에야, 마지막 물고기가 잡힌 뒤에야 그대들은 깨닫게 되리라. 사람이 돈을 먹고 살 수가 없다는 것을(크리족 인디언 예언자).’
이 메시지를 자꾸 곱씹어 보면 우리는 예외라는 안일함에 젖었다가도 다시금 가슴이 서늘해진다. 또한 낙원을 잃어버린 그들의 절절한 슬픔이 느껴진다. 먼 미래라는 안일함과 설마라는 달콤한 유혹에 우리는 이 아름다운 지구의 내일을 놓치고 있는지 모른다.
부메랑이 되돌아오고 있다. 이 아름다운 땅을 잠식해오는 불길한 소식에도 인간의 오만과 편견은 여전히 날아오른다. 마지막 나무가 호흡을 멈추고 마지막 물고기가 잡힌 뒤에야 깨닫는다면 우리 또한 이 땅에서 도태되어야할 운명인지도 모른다.
회복을 시도하는 무탄트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는 한, 그들이 쏘아 올린 희망으로 상쇄되어 버릴 것들이다. 지금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어디서 어떻게 손을 대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희망은 그럴 때를 대비해 항상 우리 곁에 있지 않은가.

EDITOR 편집팀
최명임 작가
이메일 : cmi3057@naver.com
2014년 문학저널 신인상
충북수필문학회, 한국문인협회, 한국산문 회원, 내육문학회원 / 충청타임즈 ‘생의 한가운데’ 필진(전)
청주교차로 신문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필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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