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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희망이 생겼어

  • “물리치료를 자주 받으니 다리에 힘이 생긴 것 같아…. 요즘 희망이 생겼어!” 구순을 바라보는 엄마의 입에서 튀어나온 희망이라는 낱말이 낯설게 느껴진다. 나도 모르게 무슨 희망? 하고 되묻는다. 엄마는 어둔해진 말씨로 느릿느릿 말을 이어 나간다. “응, 뭐냐 하면, 어서 벌떡 일어나 옛날처럼 너희들하고 재미나게 살고 싶어!” 아차, 또 집에 가고 싶다는 넋두리를 펼치시려는가? 실랑이를 벌일까 겁부터 난다. 요양원 면회 때마다 집이란 단어는 가급적 삼가고 있다. 그나저나 재미난 삶이라니! 잊힌 지 오래된 말처럼 들린다. 엄마에게 묻는다. 어떻게 살아야 재미난 건데? “입으로 맛난 것도 먹고….” 희망 중 제일은 입으로 먹는 세 끼 식사였다. 무슨 거창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엄마는 콧줄을 달고 있는 얼굴을 마스크로 가리려 애쓴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다. 동생이 묻는다. 뭐가 젤로 드시고 싶은데? “김치가 젤 먹고 싶어. 잘 익은 배추김치 있지? 길게 쭉쭉 찢어서 밥 위에 얹어 한입에 쏙 넣고 우적우적 씹어서 꿀떡! 이렇게.” 틀니마저 빼어버린 입이 오물거리며 입맛을 다신다. “식사 때면 별거별거 다 나와. 내가 된장국 좋아하지야? 냄새가 구수하니 좋길래 요양사에게 조금 먹어보면 안 되냐고 했어. 기도로 넘어가기라도 하면 큰일이라며 안 된다고 하더라. 쇠고기도 양념해서 볶아 나오는데 맛나 보이고…. 오늘 나온 느타리버섯은 어제 내가 다듬은 거야. 다들 먹는 걸 보면 부럽고, 어떤 때는 화도 나고 심술이 치밀어.” 엄마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나한테는 기껏 미음 같은 거 하나 달랑 달아놓고…. 물도, 약도 다 콧줄로 주니 먹는 것 같지도 않고…. 요즘은 이상하게 입안이 너무 쓰네.” 안타깝기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이구동성으로 한마디씩 거든다. 맞아, 맞아! 엄마가 입으로 드시면 얼마나 좋아? 요양원 밴드에 올라온 식단 사진 볼 때마다 우리도 속상해. 전에는 김치해서 참 잘 드셨는데! 우리 밥숟가락에도 김치 올려주곤 했던 거, 생각나지 엄마? “그럼, 그럼.” 엄마의 눈빛이 아련해진다. 요양원 입소 초기에는 콧줄을 빼고 일반식을 드시게 해 달라고 원장에게 졸라댔다. 곱게 다진 반찬을 동생들과 번갈아 가져다드리기도 했다. 일반식으로 바꾼 지 한 달쯤 지났을까? 간호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식사를 통 못 넘기신다고, 몸무게가 그새 3kg이나 빠졌다고, 위험하니 이제 그만하잔다. 다시 콧줄 식사를 받아들여야 했다. 엄마, 묽게 보여도 거기에 영양분이 골고루 들어 있는 거에요. 요즘은 집에서도 액상으로 드시는 어르신들이 많아졌어요. 그래도 이만큼 건강을 유지하고 계시니 얼마나 다행이셔? 애써 다독인다. 고개를 끄떡이는 엄마는 “알지, 알아!” 하면서도 풀이 죽는다. “옛날처럼 재미나게 살고 싶어. 시장에서 장 봐다가 맛난 것 만들어 잔뜩 차려 놓고, 며느리, 사위들, 손주들까지 다 모여 앉아 재미난 이야기도 하고….” 엄마는 생각만으로도 들뜨는지 얼굴에 화색이 돈다. 언제까지나 지속되리라 믿었던, 소박하기 그지없었던 일상이 엄마의 희망이라니! “나는 왼종일 기도해. 하루 세 번. 너희들 다 무탈하게 잘 살게 해달라고.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하고 있어. 손자 손녀, 증손주들까지.” 밥 드시는 시간까지 보태어 온통 기도에 쓰고 있어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란다. 당신을 위한 기도도 하시냐고 물었다. “빨리 낫게 해달라고, 재미나게 살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하지. 그러니 너희들도 기도해주렴.” 우리는 늘 엄마의 기도를 먹고 자랐다. 폭풍처럼 많은 일들이 나를 흔들어대는 동안 나는 기도를 잊고 살았다. “기도를 할 수 있는데 무슨 걱정인가!”라고 적힌 집 앞 교회의 현수막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엄마를 위해 간절하게 기도를 올린 게 언제였던가. 나는 가끔 엄마를 위해 기도하는데 엄마는 줄창 나를 생각하고 계신다. 엄마가 말하는 희망이 때론 유언처럼 들리기도 한다. 나는 그 말씀을 또박또박 가슴에 새긴다. 엄마가 희망을 이야기하는 동안 우리는 돌아서서 몰래 눈물을 훔친다. 마스크를 올리는 엄마의 손을 바라본다. 야윈 손이 하얗다 못해 투명하다. 지병처럼 박혀있던 굳은살도 사라졌다. 엄마의 손을 잡는다. 따스하다. 엄마가 우리 곁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감사하다고 말씀드린다. 볼그레해진 엄마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나처럼 자식들이 꼬박꼬박 찾아오는 이도 없어. 이것저것 심부름시켜도 군말 없이 달려가 사다 주고…. 너희들에게 참 고마워. 요양사들이 나 보고 예쁜 할머니래. 이 나이에 그런 말도 들어보고. 내가 복이 많아.” 엄마의 복 타령에 맞장구를 친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요양원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당신 집에 어쩌면 다니러 갔다 올 수도 있다고, 그런 날에는 가족 모두가 모일 수도 있을 거라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금기어였던 집이란 말이 비로소 봉인 해제되었다. 막막한 요양원 생활에 희망을 심고 있는 엄마, 눈물겹다. 희망이라는 게 이처럼 소박한 것이라면 어쩌면 이루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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